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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오키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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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오키모토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으로,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차남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610년에는 시모쓰케국 하가군 모기 1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히타치국 쓰쿠바군과 가와치군에 영지를 추가로 받아 야타베 번을 개척하고, 16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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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오키모토
기본 정보
씨명야타베 호소카와 가문
이름호소카와 오키모토
이명마사오키
어릴 적 이름돈고로
계명다이코인덴 유잔 간에이 다이코지
묘소도치기현하가군모테기마치의 노지인
호소카와 오키모토 상 ( [[야쿠모 신사 (모테기마치)|야쿠모 신사]])
호소카와 오키모토 상 ( 야쿠모 신사)
생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에이로쿠 9년 (1566년)
사망겐나 5년 3월 18일 (1619년5월 2일)
관직
관위종5위하・현번노카미
막부에도 막부오토기슈
주군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시모쓰케모테기 번 번주, 히타치야타베 번 번주
가계
씨족야타베 호소카와 가문
부모아버지: 호소카와 후지타카, 어머니: 누마타 자코
형제다다오키, 오키모토, 이야, 유키타카, 센, 다카유키, 가가, 구리
배우자정실: 누마타 기요노부 딸 '이토', 계실: 다치바나 무네시게 양녀 '가야' (다카하시 다네타네의 딸, 무네시게 친여동생)
자녀오키마사 (장남), 쓰루히메, 양자: 오키아키 (조카, 형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차남)
번주 정보
야타베 호소카와 가문 당주후임자: 호소카와 오키마사
모테기 번 번주 (야타베 호소카와 가문)임기: 1610년 ~ 1616년, 후임자: 번청을 야타베로 이전(호소카와 오키쓰라)
야타베 번 번주 (야타베 호소카와 가문)임기: 1616년 ~ 1619년, 대수: 1, 후임자: 호소카와 오키마사

2. 생애

1566년 호소카와 후지타카(유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본명은 『무가사기』, 『신장공기』등의 기록에는 '''창흥'''(まさおき)으로, 『관정중수제가보』에는 '''흥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형 충흥과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1577년 야마토국 가타오카성 공격에 처음으로 출진하여, 형과 함께 선봉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아버지와 형을 따라 단바·탄고 지방 평정에 참여했다. 1581년 아버지 후지타카가 탄고에 입국했을 때 이름을 현번두 흥원으로 고치고 마쓰이 야스유키와 함께 가로직에 임명되었다. 1582년 당시 탄고 슈고직이었던 잇시키씨를 멸망시키자 단바군, 다케노군 아미노쇼, 와다노 등 1만 5천 석을 받고 그해 10월에 기하라야마 성에 입성했다. 성의 본마루에 저택을 짓고 니노마루·산노마루를 축조했으며, 시가지를 열어 성하 마을을 '''령산'''(현재 교토부 옛 미네야마 정에 위치)이라고 이름 지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고, 1585년 에치고 도야마 공격,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문록의 역에서는 진주 공격 등에 참전했다.

1594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형 충흥의 차남 흥추를 양자로 맞이했다. 흥원은 흥추와 그의 어머니 갈라샤키리시탄임을 몰랐으나, 이후 알게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2]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세키가하라 전투와 그 전초전인 기후성 공격, 후쿠치야마성 공격 등에서 호소카와 군의 선봉으로 분전했다.[3]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다오키부젠국으로 영지를 옮기자 고쿠라성주를 지냈다. 그러나 다다오키와 불화하여 1601년 이웃 나라 구로다 나가마사의 지원을 받아 도망쳤다.[3] 이후 지안(자안)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은거했다. 160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형 다다오키와 화해했다.

1610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인정받아 시모쓰케국 하가군 모기 1만 석을 받고 다이묘에 임명되었다. 히데타다는 오키모토에게 10만 석을 주려고 했으나, 불화 중인 형 다다오키의 반대로 1만 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진실은 확실하지 않다.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도 참전하여 사카이 타다요시의 휘하에 있었다. 여름의 진에서는 5월 7일 아베노로 진군할 때, 다다유키의 군대를 지휘하고, 스스로도 적을 토벌하여 14명의 목을 얻었다.[4]

오사카의 진에서 세운 전공으로 1616년 히타치국 쓰쿠바군·가와치군에 6,200석을 추가로 받아 모기번에서 야타베번으로 옮기고 야타베번을 개척했다.[4] 1617년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오토기슈에 임명되었다.

1619년 에도에서 53세(57세라는 설도 있음)로 사망했다.[5] 누마타씨의 딸이 1604년에 낳은 흥창이 뒤를 이어 야타베번은 폐번치현까지 존속했다.

묘소는 도치기현 하가군 모기정의 노지인이다.[5] 원래는 모기씨의 보리사였지만, 흥원이 모기에 봉해진 후에는 9대 영주 흥관공까지 호소카와씨의 보리사였다. 묘비는 없고, 그 대신 무덤 위에 삼나무를 심고, 묘 앞에 사망 연월일을 음각한 돌등롱을 설치했다. 이 호소카와가의 묘소는 도치기현 지정 사적이다.

2. 1. 초기 생애와 오다 가문 섬김

1566년 細川藤孝(유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무가사기』, 『신장공기』등의 기록에는 본명이 '''창흥'''(まさおき)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관정중수제가보』에는 '''흥원'''만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형 충흥과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1577년 야마토국 片岡城 공격에 처음으로 출진하여, 형 충흥과 함께 선봉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아버지와 형을 따라 단바·탄고 지방 평정에 참여했다. 1581년 아버지인 후지타카가 탄고에 입국했을 때 이름을 현번두 흥원으로 고치고 마쓰이 야스유키와 함께 가로직에 임명되었다. 1582년 당시 탄고 슈고직이었던 일색씨를 멸망시키자 단바군, 다케노군 아미노쇼, 와다노 등 1만 5천 석을 받고 그해 10월에 기하라야마 성에 입성했다. 성의 본마루에 저택을 짓고 니노마루·산노마루를 축조했으며, 시가지를 열어 성하 마을을 '''령산'''(현재 교토부 옛 미네야마 정에 위치)이라고 이름 지었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다. 1585년 에치고 도야마 공격,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문록의 역에서는 진주 공격 등에 참전했다.

1594년 흥원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충흥의 차남인 흥추를 양자로 맞이했다. 이때 이미 흥추는 친어머니 갈라샤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흥원은 흥추와 갈라샤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얼마 후, 흥추의 행동과 시녀, 유모들의 이야기를 통해 키리시탄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는 갈라샤의 가르침과 가신인 가가야마 흥량(세례명 디오고), 다카야마 우콘의 권유로 세례를 받고 키리시탄이 되었다.[2] 동시에 충흥의 가신 5명도 세례를 받았다.

2. 2. 도요토미 가문 섬김

오다 노부나가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고, 1585년 에치고 도야마 공격,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문록의 역에서는 진주 공격 등에 참전했다.[2]

흥원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1594년충흥의 차남인 흥추를 양자로 맞이했다. 이때 이미 흥추는 친어머니 갈라샤에 의해 세례를 받았지만, 흥원은 흥추와 갈라샤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몰랐다. 얼마 후, 흥추의 행동과 시녀, 젖모들의 이야기를 통해 키리시탄임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 여름에는 갈라샤의 가르침과 가신인 가가야마 흥량(세례명 디오고), 다카야마 우콘의 권유도 있어 이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키리시탄이 되었다.[2] 동시에 충흥의 가신 5명도 세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고, 세키가하라 전투, 그 전초전인 기후성 공격, 그 후의 후쿠치야마성 공격에서도 호소카와 군의 선봉으로 분전했다.

2. 3. 도쿠가와 가문 섬김과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세키가하라 전투와 그 전초전인 기후성 공격, 후쿠치야마성 공격 등에서 호소카와 군의 선봉으로 분전했다.[3]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다오키부젠국으로 영지를 옮기자 고쿠라성주를 지냈다. 그러나 다다오키와 불화하여 게이초 6년(1601년) 12월, 이웃 나라 구로다 나가마사의 지원을 받아 도망쳤다.[3] 이후 지안(자안)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사카이의 묘국사에서 수년간 지낸 후 아버지 유사이를 의지하여 교토의 오가와 저택에서 은거했다. 게이초 10년경 교토에는 유사이 곁에 다다오키의 아들인 다다타카(후의 나가오카 휴무, 게이초 9년에 폐적)·오키아키 형제도 함께 살고 있었다. 게이초 13년(1608년) 봄, 슨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형 다다오키와 화해했다.

유사이 사후인 게이초 15년(1610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세키가하라에서의 용맹함을 인정받아 시모쓰케국 하가군 모기 1만 석을 받고 다이묘에 임명되었다. 진실은 확실하지 않지만, 히데타다는 오키모토에게 10만 석을 주려고 했는데 불화 중인 형 다다오키의 반대로 1만 석이 되었다고 한다.

2. 4. 다이묘 임명과 오사카 전투

도쿠가와 히데타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호소카와 오키모토가 보여준 용맹함을 인정하여 1610년(게이초 15년) 시모쓰케국 하가군 모기 1만 석을 주고 다이묘로 임명했다. 히데타다는 오키모토에게 10만 석을 주려고 했으나, 불화 중이던 형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반대로 1만 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진실은 확실하지 않다.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도 참전하여 사카이 타다요시의 휘하에 있었다. 이듬해 여름의 진에서는 5월 7일 아베노로 진군할 때, 타다요시의 아들인 사카이 다다유키의 군대를 지휘하고, 스스로도 적을 토벌하여 14명의 목을 얻었다.[4]

2. 5. 야타베 번 개척과 사망

호소카와 오키모토는 오사카의 진에서 세운 전공으로 1616년 (겐와 2년) 히타치국 쓰쿠바군·가와치군에 6,200석을 추가로 받아 거점을 모기번에서 야타베번으로 옮기고 야타베번을 개척했다.[4] 1617년(겐와 3년)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오토기슈에 임명되었다.

1619년 (겐와 5년) 3월 18일, 에도에서 53세(57세라는 설도 있음)로 사망했다.[5] 누마타씨의 딸이 1604년 (게이초 9년)에 낳은 흥창이 뒤를 이어 야타베번은 폐번치현까지 존속했다.

묘소는 도치기현 하가군 모기정의 노지인이다.[5] 원래는 모기씨의 보리사였지만, 흥원이 모기에 봉해진 후에는 9대 영주 흥관공까지 호소카와씨의 보리사였다. 묘비는 없고, 그 대신 무덤 위에 삼나무를 심고, 묘 앞에 사망 연월일을 음각한 돌등롱을 설치했다. 이 호소카와가의 묘소는 도치기현 지정 사적이다. 마찬가지로 도치기현 하가군 모기의 야쿠모 신사 산보전에는 흥원을 오마츠신으로 하는 다이코 신사 소장의 오신보와 흥원이 첫 출진 때 사용했다고 하는 갑옷 등 모기 호소카와가와 관련된 보물, 고문서 등이 소장되어 있다.

3. 가계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차남이다. 어머니는 아시카가씨의 가신이자 와카사 구마가와 성주 누마타 미쓰카네의 딸인 자향이다. 정실은 사촌인 누마타 간유자에몬 기요노부의 딸 이토이며, 계실은 가야(지코인,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양녀)이다. 원래는 타치바나 친케의 정실이었으나 후에 흥원과 재혼하였다. 형 충흥이 호소카와 테루쓰네의 양자가 되어 오슈 호소카와가를 계승했기 때문에, 흥원은 후지타카의 이즈미 반국 수호 호소카와가의 분가로서 가문을 일으켰다.[2]

구분내용
부모
정실, 계실
자녀
양자


참조

[1] 문서 細川家記、御家伝略記、細川家譜、信長公記に関する記述
[2] 서적 キリシタンになった大名
[3] 서적 綿考輯録
[4]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5] 서적 キリシタンになった大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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